고등교육 중독자 환우회

요즘 들어 가면 갈수록 "내가 옳다"고 말하는 일의 어려움을 느낀다. 내 자신이 너무 급진적인 생각을 품고 있다거나 누군가 내 대화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말하기 방식이 원치 않게 내가 사랑하는 타인들을 상처주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정확히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옳다"는 말하기 방식은 우리들의 대화 문화 속에서 거의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은 그르다"라는 방식으로 들리게 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정치적 의견을 이야기하거나 각자의 인생관들을 말하거나 들을 때 이런 인상을 주거나 또 받았었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보통 처음부터 자기의 입장을 익명의 상대에게 밝히며 논증하고 설득하기 보다는, 상대가 우선 나랑 같은 편인지 아닌지 살피고 전자면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보고 아니면 침묵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이 방법이 근본적으로 기만적인 우회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대화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개인적인 답답함과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는 것 정도를 이야기하고 싶다. 사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부분들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솔직하고 편하게 자주 그러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어떤 입장을 가진 누군가를 적으로 가정하기 보다는 같은 운명을 공유하거나 앞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잠재적 동료로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바람들이 갈등을 회피하려는 나의 비겁함에서 나온 것일런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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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TV가 없은 지가 오래라 가끔 헬스장에 가면 러닝머신을 하면 조금씩 티비를 본다. 어제 본 프로그램은 이효리와 이상순, 두분이 하시는 민박 프로그램이었는데 인상깊은 대사가 하나 있었다. 


이 분들의 민박에는 주인분들보다 훨씬 젊으신 여성 다섯 분이 손님으로 왔는데 첫날 밤 저녁 이효리 님은 본인께서는 저 나이 때 저렇게 함께 있을 또래가 없었던 것 같아서 부럽다, 그 나이 때는 왜 이렇게 마음을 열지 않았었는지 모르겠다는 후회를 한다. 모두가 적지 않게 겪는 딜레마일 것이다. 놀란 것은 그 뒤에 이상순 님의 말이었는데 "그 때는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라는 말이었다.

 

나도 개인적으로 이효리 님과 비슷한 후회를 하고 또 들을 일이 있었지만 저런 종류의 후회들에는 "지금부터라도..."라는 식의 말을 이어서 듣고 또 했었던 것 같기에 신선했다. 사실 그때는 그럴 이유가 있었더랬지 싶다. 지금의 나에게는 과거의 나는 작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 때 나의 '주관적' 어리석음은 그때의 상황과 조건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상순 님의 조언은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누군가가 과거 자신의 어리석음이 어리석다는 이유로 배척할 때 그것을 그 관점에서 이해하고 왜 그랬는지 보여주는 것, 그래서 이를 통해 정말 과거의 자신을 부인하며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작별할 수 있게 해주는 것. 


이는 개인적 성찰의 수준을 넘어서는 일인데 과거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는 현재 타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경멸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개인적 후회들에는 "근데 왜 저 누구는 과거 내가 살았던 방식처럼 사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이 따라붙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과거 자신의 찌질함은 현재 타인과 사회의 찌질함을 비판하는 논거로 활용된다.


개인적으로 언제부터인가 식자층들이 '비판'이라는 이름 아래 하는 일들도 이상순 님의 이야기와 비슷한 것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떤 '어리석음'을 보았을 때 그걸 어떤 보편적이라고 간주되는 가치, 이를테면 인권과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에 기반하여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으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받고 그 정도의 비판 능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동어반복이 되기 쉽다. 또한 지식인들이 오늘날 대학처럼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세계관을 포괄하지 못하고 있는 특수한 조직에서만 기거하고 있다는 상황을 생각해 볼 때 앞서의 비판은 '대학의 상식'의 입장에서 '세계의 상식'을 나무라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렵다. 이런 나무람은 그 자체의 의의를 가지기는 하지만 절대로 이 사람을 끌어올려주거나 설득하려는 관점은 아니다. 몰아내고 배척하고 이 사람이 어디 다른 데 가서 배워오거나 노력하라고 요구하는 관점이다. 존재만으로 서로 의의를 가지는 동료시민을 대하는 시선은 아니고 적 또는 마음에 안 드는 아이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비판에 선행하는 이해와 그 이해에 기반해 다시 시작되야 하는 새로운 비판이라는 문제를 요즘 여러 계기들을 통해 생각해 보고 있다. 이효리 님과 이상순 님의 대화라든지, 최근 다른 분들의 포스트들에서 본 연구에 대한 고민이라든지, 최현숙 님의 <할배의 탄생>같은 작업이나 부르디외의 호모 아카데미쿠스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볼탄스키의 프래그머티즘적 사회학 기획이라든지 납세 거부 운동을 연구한 아이작 마틴의 작업이라든지 공화당 내부의 흑인을 연구한 코리 필드의 책이라든지 등등...관심있는 분들과 나누고 싶은 북리뷰 하나만 추천해 본다. 트럼프 당선 이후 쏟아진 책들에 대한 아이작 마틴의 서평이다.

http://www.booksandideas.net/Deplorable-yourself.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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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 관한 박은하 기자의 다음 기사를 보고 떠오른 생각.


머리는 복잡하고 손발은 게으른 1인으로서 항상 연구 아이디어들을 궁리해 보고 만지작 거리지만 그 중에서도 몇 가지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지방'의 PC방이다. 부모님 집에 쉬러 갔다가 잠시 인쇄할 일이 있어 PC방에 갔던 기억이 잊혀지질 않아서이다. 


들리는 PC방마다 워드는 물론 한글도 깔려있지 않아서 여러 PC방을 전전했어야 했는데 그 때마다 보이는 공통점들이 놀라웠다. 우선 PC방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수와 구성이었다. 빈 자리는 거의 없었으며 PC방 자체가 공간이 매우 넓었다. 두 블록 정도 되는 공간에 PC방도 4개 정도 있었다. 앉아있는 분들은 작업복을 입은 중장년의 노동자부터 초등학생까지 널리 포진해 있었으면 플레이되고 있는 게임은 리니지부터 블레이드앤소울이나 스타2(당시에는 최신이었다)까지 전통(?)과 현대(?)를 모두 아울렀다. 


다른 하나는 컴퓨터의 사양이었다. 서울에서 PC방을 다니지 앉은지 꽤 되었지만 가끔 들를 일이 있으면 게임이 그냥 돌아가는 사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반면, '지방'의 PC방은 모든 컴퓨터가 고가의 기계식 키보드였고 모니터의 크기도 압도적이었으며 심지어 어떤 자리는 더블 모니터를 채택하고 있었다. 


PC방을 나와서 바라본 고향의 모든 풍경은 정체 또는 퇴보였다. 초등학교 때 있던 가게는 그대로 있거나 비슷한 가게로 대체되었으며 몇 개의 대형마트들 이외에 도시에 큰 변화는 없으며 그마저도 생긴지 이제는 10년이 되어가는 마트들이었다. 변함이 없거나 서서히 말라간다는 느낌의 야외와 서울보다도 더 발달한 PC방에 모여 있는 유년, 청년, 장년, 심지어 노년의 남성들을 보면서 이게 지금의 '지방'이구나, 라는 생각이 떠올랐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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